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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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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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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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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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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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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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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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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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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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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