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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숲길만 가세요
<김종호 에세이> 요즘 꽃길이 세간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덕담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꽃길만 가세요' 가 대표적이다. 이 덕담을 처음으로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꽃길만 가라' 그 꽃길이 과연 행복한 길이란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꽃길은 행복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꽃길은 누구나 가고 싶은 길로 인식하면 첫째 경쟁이 심할 것이다. 둘째 경쟁이 심하면 함정이 많을 것이다. 셋째 함정이라면 해악을 끼칠수 있는 뱀이나 벌 멧돼지 등이 도사리고 있을수 있다. 그런 꽃길을 가라니 나보고 심한 고생을 하라는 것인가. 경쟁은 온갓 권모술수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수 없다. 거기서 승리한다면 온전히 꽃길을 갈수 있겠지만 탈락한다면 심한 고통이 올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꽃길은 일부 극소수만 갈수 있는 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꽃길은 조직폭력배들이나 가는 길로 문득 인식이 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많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그 꽃길은 누가 갈까. 치열한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일단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시험이다. 최고의 시험이 사법고시 행정고시 나아가 임용고시 등 각종 고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꽃길을 가지 않겠는가. 다음이 장사다. 기업일 것이다. 제조든 수출입이든 지식이든 어떤 상품 판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꽃길이란 부의 축적이다. 부자가 되면서 꽃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국민 중 꽃길을 가는 사람은 고급공무원과 고급 기업인이다. 때문에 '꽃길만 가세요' 하는 말은 '고급공무원 고급기업인이 되세요' 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나열한 내용은 아주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이다. 꽃길이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도 해당 될 것이다. 마음의 꽃길의 경우 요즘 공직자로 퇴직한 사람을 들고 싶다. 그 이유는 생활에 안정된 연금 때문이다. 더구나 일선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경쟁이 없거나 미세하다. 필자가 아는 어떤 교장은 1년에 한두번 세계여행을 다녀온다. 물론 '여행이 행복하다' 고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다녀오는 방법이 온전히 연금으로 인한 것이다. 월 350만원의 연금 중 200여만원을 따로 떼어 여행경비로 사용한다. 연간 2천만원이 넘는다. 그 돈으로 반 자유여행을 즐긴다. 그 기간은 1개월이상 3개월 정도 된다. 3개월을 남미 또는 북미 유렵 등에 머물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꽃길이 아니겠는가. 다른 꽃길이 또 어디 있는가. 꽃길의 조건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면 경쟁이 없는 경우도 꽃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꽃길의 대상자는 은퇴자가 될 것으로 본다. 다음에 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꽃은 주로 봄에 핀다. 봄에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때문에 필자는 '꽃은 온전히 유혹이다' 라고 본다. '유혹이 아닌 꽃은 꽃이 아니다' 라고 감히 말할수 있다. 유혹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곁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꽃이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다음은 향기가 있어야 한다. 유혹에서 더 필요하다면 꿀이 있어야 한다. 꽃은 이 3가지를 모두 겸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유혹이다. 그렇다면 유혹이란 또 무엇인가. 유혹속에 어떤 목적이 들어 있다. 그래야 유혹이 된다. 목적이 있게 되면 함정과 거짓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경쟁과 연결이 된다. 때문에 '꽃은 경쟁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꽃길만 가세요' 라는 덕담을 듣고 기분이 묘해지는 원인이다. 꽃이 핀다고/김종호 목련 진달래가 미소짓는다 하여 설레이지 마라 벚꽃이 핀다고 바람이 그치거나 해가 식거나 하늘이 내려오지 않는다 꽃이 필때 지는 때를 생각하면 슬프겠지만 어쩔수 없는 것이 꽃이다 꽃은 열매를 맺기위해 그저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덕담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물론 덕담으로 건네는 인사이다. 그러나 이 꽃길이라는 것이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숲길이다. 굳이 길을 만들자면 꽃길 숲길 물길 들길 자갈길 풀길 등이 생각난다. 이 중에서 필자는 숲길을 권장하고 싶다. 덕담도 '숲길만 가세요' 라고 들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숲은 어머니' 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랑' 이다. 나무로 구성된 숲 그 나무는 바로 희생이요 사랑이요 비전이다. 숲은 목적이 없으니 경쟁도 없다. 꽃은 벌나비를 끌여들여 수정한 다음 열매를 얻기 위해 그 아름다움과 향기와 꿀을 제공하지만 나무는 그런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으니 순전히 사랑인 것이다. 우선 나무는 인간의 목숨줄인 산소를 내 놓고 인간의 배설물인 이산화탄소를 먹는다. 나무 자체가 이산화탄소다. 요즘 무모한 벌목으로 지구상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서 지구온난화의 현상이 발생하고있다. 다음이 초록이다. 초록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 행복감을 주는 색이다. 그리고 휴양 물 자연의 해악을 막아주기도 한다. 가을의 단풍은 어떤가. 어떤 분들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단풍이라고하지 않는가. 단풍은 노을 같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무로 인해 발생되는 단풍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때문에 꽃 축제 보다는 단풍축제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이다. 단풍에 환호하는 것이다. 이 어찌 나무가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나 더 들자. 겨울의 눈꽃은 또 어떤가. 혹시 태백산을 올라 보았는가. 거기 오르면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꽃이 얼마나 황홀한지 극명하게 볼수 있을 것이다. 눈꽃도 나무별로 그 아름다움이 다르다. 소나무에 핀 눈꽃, 주목에 핀 눈꽃, 작은 나무들의 줄기에 핀 꽃, 멀리서 한번에 볼수 있는 눈꽃 그림, 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하나 더 들자. 봄꽃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봄 새순은 어떤가. 그 새순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혹시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 보라. 그리고 나무의 눈인 그 새순과 눈을 마주쳐 보라. 땅에서 올라오는 아기 새순, 겨우내 잠들다가 이제 막 오르고 있는 참나무 새순, 이 역시 아름다워 미쳐버릴 지경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무가 주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은 모두 유혹이 없다. 유혹이 없기 때문에 나무는 위대한 것이다. 온전히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무는 죽어서까지 우리 인간에게 유익을 준다. 바로 목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과 가구 생활용품을 준다. 숲에 남게 되면 온갓 곤충과 생명들의 집과 먹이 등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나무요 숲인 것이다. 오죽하면 숲은 어머니라고 할까. 때문에 필자는 덕담을 건넬때 '꽃길만 가세요' 보다는 '숲길만 가세요' 라고 말한다. 숲길을 가면서 가끔은 꽃길이나 물길 자갈길 모래길을 가는 것이 삶의 양념으로 좋은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분 숲길만 가세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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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자연은 큰 스승'
<김종호 에세이> 자연은 큰 스승이다. 그래서 늘 인사를 나누며 산다. 크게 말하면 자연의 스승은 4분이다. 4분이라 함은 계절을 말한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다. 그 속의 풀과 물 등 대부분의 존재도 역시 필자의 스승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사람의 스승'과 '자연의 스승'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생각해 보자. 필자는 나이 60이 넘어 철이 없게도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이란 무엇이던가. 또 국어사전을 보자.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가르친다'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이끌어 준다' 무엇을 이끌어 준다는 것인가. 필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가르친다는 것은 수학 국어 등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가.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맞는 말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가 않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 댓가인 돈을 받는다. 여기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댓가를 받으면서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속에 삶의지혜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삶의 교육은 주관적이다. 주관성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통해 삶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과제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능과 습성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 일단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어떤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가. 변화무쌍하다. 변화무쌍한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가. 본래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때문에 자연처럼 산다. 그러니 자연과 더불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렇다. 사람도 자연을 닮은 것이다. 아니 사람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다. 무슨 큰 것을 발견한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다 아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댓가'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날씨 하나만 봐도 알수 있다. 조석으로 변한다. 아니 시간별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날씨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해와 달 물과 산 구름 바람 풀과 나무 등을 닮는다. 크게는 계절을 직접적으로 닮아갈 것이다. 바로 변화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이다. 이제 되었다.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수 있는 것은 명확해 졌다. 그래서 자연을 읽는 것이다. 필자는 50대 이후 책을 거의 보지 않는다. 이 말을 자신있게 말한다.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연을 읽는다. 풀을 읽고 바람을 읽고 물을 읽고 바다를 읽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새와 잠자리와 매뚜기 개미 등을 읽는다. 오죽하면 자연과 더 밀착해지기 위해 사계절을 내 연인으로 삼았겠는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은 늘 필자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은 봄이 필자에게 '당신 사랑해' 의 표언이다. 또 여름은 가끔 소니기를 퍼붓는데 이 소나기가 필자에 대한 사랑 고백이며, 가을여인은 낙엽을 떨어뜨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필자에 대한 사랑고백이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떻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함박눈을 내린다. 그것이 사랑 고백이다. 겨울과 필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하나 보자. 겨울 고백/ 함박눈이 내린다 겨울 음성을 듣고 들판으로 달려간다 함박눈은 나를 향한 겨울의 사랑 고백 너는 처음처럼 다가오고 나는 꿈을 꾸듯 다가가고 너는 속삭이며 나를 안고 나는 설레이며 너를 바라보고 너는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나는 너를 따라 걷고 걷고 하염없이 걷고 너의 소리없는 속삭임이 그칠때쯤 우리는 꽃이 되었다 멈추어 서서 하얀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이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4명의 여인 중 여름과 겨울이 주도적이다. 봄과 가을은 그 세력이 약하다. 여름과 겨울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한번 보자.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모두 갈등관계이다. 한번도 사이가 좋은 적이 없다. 그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는 시점이 바로 환절기이다. 필자는 환절기를 여인들의 전쟁으로 본다. 모두 필자를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사람은 빼 닮은 것이다. '사계절은 늘 갈등관계이며 순환한다' 로 결론을 짓는다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두렵지 아니한가. 사람은 다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툰다는 의미는 지면 다치고 죽거나 노예가 될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거나 노예라는 표현에 반감을 가질수가 있는데 원초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법을 만들어 규제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개인도 조직도 기업도 국가도 거기에 맞는 크기 만큼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허상이다. 여름과 겨울처럼 힘의 우열이 확연하게 가려졌기 때문이다. 환절기가 오면 극명하게 대립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자연속으로 들어가 보자. 바람을 시련으로 보았을때 바람앞에 의젓하게 서 있는 생명체가 있는가. 모두 춤을 추어야 산다. 풀과 꽃과 물과 나무 모두 바람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 살수 있는 것이다. 해가 비추면 고개를 들고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고 겨울이 오면 내 수족의 일부를 버리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엔 이 사계절이 있어서 잘 돌아간다. 여름만 있는 세상도 있지만 그 세상이 바람직 한가. 여기서 발전의 원동력은 창의이며 갈등이며 불편 그리고 경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겨울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필자는 겨울을 전환기로 본다. 혁신으로 본다. 독재로 본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으로 본다. 이 겨울이 지나야 다시 봄이 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부정하고 싶은 자연의 현상이다. 사람도 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이 사계절이 존재함으로써 자연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상도 잘 돌아갈수 있다고 말하면 공감 하겠는가. 우리는 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스승이다. 책도 스승이다. 그러나 자연은 큰 스승이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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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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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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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숲길만 가세요
- <김종호 에세이> 요즘 꽃길이 세간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덕담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꽃길만 가세요' 가 대표적이다. 이 덕담을 처음으로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꽃길만 가라' 그 꽃길이 과연 행복한 길이란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꽃길은 행복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꽃길은 누구나 가고 싶은 길로 인식하면 첫째 경쟁이 심할 것이다. 둘째 경쟁이 심하면 함정이 많을 것이다. 셋째 함정이라면 해악을 끼칠수 있는 뱀이나 벌 멧돼지 등이 도사리고 있을수 있다. 그런 꽃길을 가라니 나보고 심한 고생을 하라는 것인가. 경쟁은 온갓 권모술수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수 없다. 거기서 승리한다면 온전히 꽃길을 갈수 있겠지만 탈락한다면 심한 고통이 올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꽃길은 일부 극소수만 갈수 있는 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꽃길은 조직폭력배들이나 가는 길로 문득 인식이 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많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그 꽃길은 누가 갈까. 치열한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일단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시험이다. 최고의 시험이 사법고시 행정고시 나아가 임용고시 등 각종 고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꽃길을 가지 않겠는가. 다음이 장사다. 기업일 것이다. 제조든 수출입이든 지식이든 어떤 상품 판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꽃길이란 부의 축적이다. 부자가 되면서 꽃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국민 중 꽃길을 가는 사람은 고급공무원과 고급 기업인이다. 때문에 '꽃길만 가세요' 하는 말은 '고급공무원 고급기업인이 되세요' 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나열한 내용은 아주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이다. 꽃길이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도 해당 될 것이다. 마음의 꽃길의 경우 요즘 공직자로 퇴직한 사람을 들고 싶다. 그 이유는 생활에 안정된 연금 때문이다. 더구나 일선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경쟁이 없거나 미세하다. 필자가 아는 어떤 교장은 1년에 한두번 세계여행을 다녀온다. 물론 '여행이 행복하다' 고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다녀오는 방법이 온전히 연금으로 인한 것이다. 월 350만원의 연금 중 200여만원을 따로 떼어 여행경비로 사용한다. 연간 2천만원이 넘는다. 그 돈으로 반 자유여행을 즐긴다. 그 기간은 1개월이상 3개월 정도 된다. 3개월을 남미 또는 북미 유렵 등에 머물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꽃길이 아니겠는가. 다른 꽃길이 또 어디 있는가. 꽃길의 조건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면 경쟁이 없는 경우도 꽃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꽃길의 대상자는 은퇴자가 될 것으로 본다. 다음에 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꽃은 주로 봄에 핀다. 봄에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때문에 필자는 '꽃은 온전히 유혹이다' 라고 본다. '유혹이 아닌 꽃은 꽃이 아니다' 라고 감히 말할수 있다. 유혹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곁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꽃이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다음은 향기가 있어야 한다. 유혹에서 더 필요하다면 꿀이 있어야 한다. 꽃은 이 3가지를 모두 겸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유혹이다. 그렇다면 유혹이란 또 무엇인가. 유혹속에 어떤 목적이 들어 있다. 그래야 유혹이 된다. 목적이 있게 되면 함정과 거짓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경쟁과 연결이 된다. 때문에 '꽃은 경쟁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꽃길만 가세요' 라는 덕담을 듣고 기분이 묘해지는 원인이다. 꽃이 핀다고/김종호 목련 진달래가 미소짓는다 하여 설레이지 마라 벚꽃이 핀다고 바람이 그치거나 해가 식거나 하늘이 내려오지 않는다 꽃이 필때 지는 때를 생각하면 슬프겠지만 어쩔수 없는 것이 꽃이다 꽃은 열매를 맺기위해 그저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덕담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물론 덕담으로 건네는 인사이다. 그러나 이 꽃길이라는 것이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숲길이다. 굳이 길을 만들자면 꽃길 숲길 물길 들길 자갈길 풀길 등이 생각난다. 이 중에서 필자는 숲길을 권장하고 싶다. 덕담도 '숲길만 가세요' 라고 들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숲은 어머니' 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랑' 이다. 나무로 구성된 숲 그 나무는 바로 희생이요 사랑이요 비전이다. 숲은 목적이 없으니 경쟁도 없다. 꽃은 벌나비를 끌여들여 수정한 다음 열매를 얻기 위해 그 아름다움과 향기와 꿀을 제공하지만 나무는 그런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으니 순전히 사랑인 것이다. 우선 나무는 인간의 목숨줄인 산소를 내 놓고 인간의 배설물인 이산화탄소를 먹는다. 나무 자체가 이산화탄소다. 요즘 무모한 벌목으로 지구상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서 지구온난화의 현상이 발생하고있다. 다음이 초록이다. 초록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 행복감을 주는 색이다. 그리고 휴양 물 자연의 해악을 막아주기도 한다. 가을의 단풍은 어떤가. 어떤 분들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단풍이라고하지 않는가. 단풍은 노을 같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무로 인해 발생되는 단풍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때문에 꽃 축제 보다는 단풍축제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이다. 단풍에 환호하는 것이다. 이 어찌 나무가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나 더 들자. 겨울의 눈꽃은 또 어떤가. 혹시 태백산을 올라 보았는가. 거기 오르면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꽃이 얼마나 황홀한지 극명하게 볼수 있을 것이다. 눈꽃도 나무별로 그 아름다움이 다르다. 소나무에 핀 눈꽃, 주목에 핀 눈꽃, 작은 나무들의 줄기에 핀 꽃, 멀리서 한번에 볼수 있는 눈꽃 그림, 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하나 더 들자. 봄꽃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봄 새순은 어떤가. 그 새순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혹시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 보라. 그리고 나무의 눈인 그 새순과 눈을 마주쳐 보라. 땅에서 올라오는 아기 새순, 겨우내 잠들다가 이제 막 오르고 있는 참나무 새순, 이 역시 아름다워 미쳐버릴 지경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무가 주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은 모두 유혹이 없다. 유혹이 없기 때문에 나무는 위대한 것이다. 온전히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무는 죽어서까지 우리 인간에게 유익을 준다. 바로 목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과 가구 생활용품을 준다. 숲에 남게 되면 온갓 곤충과 생명들의 집과 먹이 등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나무요 숲인 것이다. 오죽하면 숲은 어머니라고 할까. 때문에 필자는 덕담을 건넬때 '꽃길만 가세요' 보다는 '숲길만 가세요' 라고 말한다. 숲길을 가면서 가끔은 꽃길이나 물길 자갈길 모래길을 가는 것이 삶의 양념으로 좋은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분 숲길만 가세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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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숲길만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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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자연은 큰 스승'
- <김종호 에세이> 자연은 큰 스승이다. 그래서 늘 인사를 나누며 산다. 크게 말하면 자연의 스승은 4분이다. 4분이라 함은 계절을 말한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다. 그 속의 풀과 물 등 대부분의 존재도 역시 필자의 스승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사람의 스승'과 '자연의 스승'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생각해 보자. 필자는 나이 60이 넘어 철이 없게도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이란 무엇이던가. 또 국어사전을 보자.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가르친다'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이끌어 준다' 무엇을 이끌어 준다는 것인가. 필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가르친다는 것은 수학 국어 등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가.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맞는 말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가 않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 댓가인 돈을 받는다. 여기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댓가를 받으면서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속에 삶의지혜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삶의 교육은 주관적이다. 주관성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통해 삶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과제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능과 습성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 일단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어떤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가. 변화무쌍하다. 변화무쌍한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가. 본래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때문에 자연처럼 산다. 그러니 자연과 더불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렇다. 사람도 자연을 닮은 것이다. 아니 사람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다. 무슨 큰 것을 발견한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다 아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댓가'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날씨 하나만 봐도 알수 있다. 조석으로 변한다. 아니 시간별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날씨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해와 달 물과 산 구름 바람 풀과 나무 등을 닮는다. 크게는 계절을 직접적으로 닮아갈 것이다. 바로 변화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이다. 이제 되었다.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수 있는 것은 명확해 졌다. 그래서 자연을 읽는 것이다. 필자는 50대 이후 책을 거의 보지 않는다. 이 말을 자신있게 말한다.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연을 읽는다. 풀을 읽고 바람을 읽고 물을 읽고 바다를 읽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새와 잠자리와 매뚜기 개미 등을 읽는다. 오죽하면 자연과 더 밀착해지기 위해 사계절을 내 연인으로 삼았겠는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은 늘 필자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은 봄이 필자에게 '당신 사랑해' 의 표언이다. 또 여름은 가끔 소니기를 퍼붓는데 이 소나기가 필자에 대한 사랑 고백이며, 가을여인은 낙엽을 떨어뜨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필자에 대한 사랑고백이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떻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함박눈을 내린다. 그것이 사랑 고백이다. 겨울과 필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하나 보자. 겨울 고백/ 함박눈이 내린다 겨울 음성을 듣고 들판으로 달려간다 함박눈은 나를 향한 겨울의 사랑 고백 너는 처음처럼 다가오고 나는 꿈을 꾸듯 다가가고 너는 속삭이며 나를 안고 나는 설레이며 너를 바라보고 너는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나는 너를 따라 걷고 걷고 하염없이 걷고 너의 소리없는 속삭임이 그칠때쯤 우리는 꽃이 되었다 멈추어 서서 하얀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이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4명의 여인 중 여름과 겨울이 주도적이다. 봄과 가을은 그 세력이 약하다. 여름과 겨울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한번 보자.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모두 갈등관계이다. 한번도 사이가 좋은 적이 없다. 그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는 시점이 바로 환절기이다. 필자는 환절기를 여인들의 전쟁으로 본다. 모두 필자를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사람은 빼 닮은 것이다. '사계절은 늘 갈등관계이며 순환한다' 로 결론을 짓는다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두렵지 아니한가. 사람은 다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툰다는 의미는 지면 다치고 죽거나 노예가 될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거나 노예라는 표현에 반감을 가질수가 있는데 원초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법을 만들어 규제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개인도 조직도 기업도 국가도 거기에 맞는 크기 만큼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허상이다. 여름과 겨울처럼 힘의 우열이 확연하게 가려졌기 때문이다. 환절기가 오면 극명하게 대립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자연속으로 들어가 보자. 바람을 시련으로 보았을때 바람앞에 의젓하게 서 있는 생명체가 있는가. 모두 춤을 추어야 산다. 풀과 꽃과 물과 나무 모두 바람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 살수 있는 것이다. 해가 비추면 고개를 들고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고 겨울이 오면 내 수족의 일부를 버리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엔 이 사계절이 있어서 잘 돌아간다. 여름만 있는 세상도 있지만 그 세상이 바람직 한가. 여기서 발전의 원동력은 창의이며 갈등이며 불편 그리고 경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겨울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필자는 겨울을 전환기로 본다. 혁신으로 본다. 독재로 본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으로 본다. 이 겨울이 지나야 다시 봄이 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부정하고 싶은 자연의 현상이다. 사람도 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이 사계절이 존재함으로써 자연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상도 잘 돌아갈수 있다고 말하면 공감 하겠는가. 우리는 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스승이다. 책도 스승이다. 그러나 자연은 큰 스승이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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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자연은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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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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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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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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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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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숲길만 가세요
- <김종호 에세이> 요즘 꽃길이 세간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덕담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꽃길만 가세요' 가 대표적이다. 이 덕담을 처음으로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꽃길만 가라' 그 꽃길이 과연 행복한 길이란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꽃길은 행복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꽃길은 누구나 가고 싶은 길로 인식하면 첫째 경쟁이 심할 것이다. 둘째 경쟁이 심하면 함정이 많을 것이다. 셋째 함정이라면 해악을 끼칠수 있는 뱀이나 벌 멧돼지 등이 도사리고 있을수 있다. 그런 꽃길을 가라니 나보고 심한 고생을 하라는 것인가. 경쟁은 온갓 권모술수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수 없다. 거기서 승리한다면 온전히 꽃길을 갈수 있겠지만 탈락한다면 심한 고통이 올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꽃길은 일부 극소수만 갈수 있는 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꽃길은 조직폭력배들이나 가는 길로 문득 인식이 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많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그 꽃길은 누가 갈까. 치열한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일단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시험이다. 최고의 시험이 사법고시 행정고시 나아가 임용고시 등 각종 고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꽃길을 가지 않겠는가. 다음이 장사다. 기업일 것이다. 제조든 수출입이든 지식이든 어떤 상품 판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꽃길이란 부의 축적이다. 부자가 되면서 꽃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국민 중 꽃길을 가는 사람은 고급공무원과 고급 기업인이다. 때문에 '꽃길만 가세요' 하는 말은 '고급공무원 고급기업인이 되세요' 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나열한 내용은 아주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이다. 꽃길이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도 해당 될 것이다. 마음의 꽃길의 경우 요즘 공직자로 퇴직한 사람을 들고 싶다. 그 이유는 생활에 안정된 연금 때문이다. 더구나 일선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경쟁이 없거나 미세하다. 필자가 아는 어떤 교장은 1년에 한두번 세계여행을 다녀온다. 물론 '여행이 행복하다' 고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다녀오는 방법이 온전히 연금으로 인한 것이다. 월 350만원의 연금 중 200여만원을 따로 떼어 여행경비로 사용한다. 연간 2천만원이 넘는다. 그 돈으로 반 자유여행을 즐긴다. 그 기간은 1개월이상 3개월 정도 된다. 3개월을 남미 또는 북미 유렵 등에 머물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꽃길이 아니겠는가. 다른 꽃길이 또 어디 있는가. 꽃길의 조건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면 경쟁이 없는 경우도 꽃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꽃길의 대상자는 은퇴자가 될 것으로 본다. 다음에 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꽃은 주로 봄에 핀다. 봄에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때문에 필자는 '꽃은 온전히 유혹이다' 라고 본다. '유혹이 아닌 꽃은 꽃이 아니다' 라고 감히 말할수 있다. 유혹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곁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꽃이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다음은 향기가 있어야 한다. 유혹에서 더 필요하다면 꿀이 있어야 한다. 꽃은 이 3가지를 모두 겸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유혹이다. 그렇다면 유혹이란 또 무엇인가. 유혹속에 어떤 목적이 들어 있다. 그래야 유혹이 된다. 목적이 있게 되면 함정과 거짓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경쟁과 연결이 된다. 때문에 '꽃은 경쟁이다'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꽃길만 가세요' 라는 덕담을 듣고 기분이 묘해지는 원인이다. 꽃이 핀다고/김종호 목련 진달래가 미소짓는다 하여 설레이지 마라 벚꽃이 핀다고 바람이 그치거나 해가 식거나 하늘이 내려오지 않는다 꽃이 필때 지는 때를 생각하면 슬프겠지만 어쩔수 없는 것이 꽃이다 꽃은 열매를 맺기위해 그저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덕담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물론 덕담으로 건네는 인사이다. 그러나 이 꽃길이라는 것이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숲길이다. 굳이 길을 만들자면 꽃길 숲길 물길 들길 자갈길 풀길 등이 생각난다. 이 중에서 필자는 숲길을 권장하고 싶다. 덕담도 '숲길만 가세요' 라고 들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숲은 어머니' 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랑' 이다. 나무로 구성된 숲 그 나무는 바로 희생이요 사랑이요 비전이다. 숲은 목적이 없으니 경쟁도 없다. 꽃은 벌나비를 끌여들여 수정한 다음 열매를 얻기 위해 그 아름다움과 향기와 꿀을 제공하지만 나무는 그런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으니 순전히 사랑인 것이다. 우선 나무는 인간의 목숨줄인 산소를 내 놓고 인간의 배설물인 이산화탄소를 먹는다. 나무 자체가 이산화탄소다. 요즘 무모한 벌목으로 지구상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서 지구온난화의 현상이 발생하고있다. 다음이 초록이다. 초록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 행복감을 주는 색이다. 그리고 휴양 물 자연의 해악을 막아주기도 한다. 가을의 단풍은 어떤가. 어떤 분들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단풍이라고하지 않는가. 단풍은 노을 같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무로 인해 발생되는 단풍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때문에 꽃 축제 보다는 단풍축제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이다. 단풍에 환호하는 것이다. 이 어찌 나무가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나 더 들자. 겨울의 눈꽃은 또 어떤가. 혹시 태백산을 올라 보았는가. 거기 오르면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꽃이 얼마나 황홀한지 극명하게 볼수 있을 것이다. 눈꽃도 나무별로 그 아름다움이 다르다. 소나무에 핀 눈꽃, 주목에 핀 눈꽃, 작은 나무들의 줄기에 핀 꽃, 멀리서 한번에 볼수 있는 눈꽃 그림, 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하나 더 들자. 봄꽃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봄 새순은 어떤가. 그 새순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혹시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 보라. 그리고 나무의 눈인 그 새순과 눈을 마주쳐 보라. 땅에서 올라오는 아기 새순, 겨우내 잠들다가 이제 막 오르고 있는 참나무 새순, 이 역시 아름다워 미쳐버릴 지경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무가 주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은 모두 유혹이 없다. 유혹이 없기 때문에 나무는 위대한 것이다. 온전히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무는 죽어서까지 우리 인간에게 유익을 준다. 바로 목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과 가구 생활용품을 준다. 숲에 남게 되면 온갓 곤충과 생명들의 집과 먹이 등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나무요 숲인 것이다. 오죽하면 숲은 어머니라고 할까. 때문에 필자는 덕담을 건넬때 '꽃길만 가세요' 보다는 '숲길만 가세요' 라고 말한다. 숲길을 가면서 가끔은 꽃길이나 물길 자갈길 모래길을 가는 것이 삶의 양념으로 좋은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분 숲길만 가세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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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숲길만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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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자연은 큰 스승'
- <김종호 에세이> 자연은 큰 스승이다. 그래서 늘 인사를 나누며 산다. 크게 말하면 자연의 스승은 4분이다. 4분이라 함은 계절을 말한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다. 그 속의 풀과 물 등 대부분의 존재도 역시 필자의 스승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사람의 스승'과 '자연의 스승'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생각해 보자. 필자는 나이 60이 넘어 철이 없게도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이란 무엇이던가. 또 국어사전을 보자.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가르친다'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이끌어 준다' 무엇을 이끌어 준다는 것인가. 필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가르친다는 것은 수학 국어 등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가. 스승은 지식과 삶을 가르쳐 주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맞는 말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가 않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 댓가인 돈을 받는다. 여기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댓가를 받으면서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속에 삶의지혜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삶의 교육은 주관적이다. 주관성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통해 삶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과제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능과 습성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 일단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어떤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가. 변화무쌍하다. 변화무쌍한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가. 본래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때문에 자연처럼 산다. 그러니 자연과 더불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렇다. 사람도 자연을 닮은 것이다. 아니 사람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다. 무슨 큰 것을 발견한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다 아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댓가'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의 스승에 대해 의심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날씨 하나만 봐도 알수 있다. 조석으로 변한다. 아니 시간별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날씨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해와 달 물과 산 구름 바람 풀과 나무 등을 닮는다. 크게는 계절을 직접적으로 닮아갈 것이다. 바로 변화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이다. 이제 되었다. 자연을 보면 사람을 알수 있는 것은 명확해 졌다. 그래서 자연을 읽는 것이다. 필자는 50대 이후 책을 거의 보지 않는다. 이 말을 자신있게 말한다.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연을 읽는다. 풀을 읽고 바람을 읽고 물을 읽고 바다를 읽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새와 잠자리와 매뚜기 개미 등을 읽는다. 오죽하면 자연과 더 밀착해지기 위해 사계절을 내 연인으로 삼았겠는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은 늘 필자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은 봄이 필자에게 '당신 사랑해' 의 표언이다. 또 여름은 가끔 소니기를 퍼붓는데 이 소나기가 필자에 대한 사랑 고백이며, 가을여인은 낙엽을 떨어뜨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필자에 대한 사랑고백이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떻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함박눈을 내린다. 그것이 사랑 고백이다. 겨울과 필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하나 보자. 겨울 고백/ 함박눈이 내린다 겨울 음성을 듣고 들판으로 달려간다 함박눈은 나를 향한 겨울의 사랑 고백 너는 처음처럼 다가오고 나는 꿈을 꾸듯 다가가고 너는 속삭이며 나를 안고 나는 설레이며 너를 바라보고 너는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나는 너를 따라 걷고 걷고 하염없이 걷고 너의 소리없는 속삭임이 그칠때쯤 우리는 꽃이 되었다 멈추어 서서 하얀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이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4명의 여인 중 여름과 겨울이 주도적이다. 봄과 가을은 그 세력이 약하다. 여름과 겨울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한번 보자.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모두 갈등관계이다. 한번도 사이가 좋은 적이 없다. 그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는 시점이 바로 환절기이다. 필자는 환절기를 여인들의 전쟁으로 본다. 모두 필자를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사람은 빼 닮은 것이다. '사계절은 늘 갈등관계이며 순환한다' 로 결론을 짓는다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두렵지 아니한가. 사람은 다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툰다는 의미는 지면 다치고 죽거나 노예가 될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거나 노예라는 표현에 반감을 가질수가 있는데 원초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법을 만들어 규제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개인도 조직도 기업도 국가도 거기에 맞는 크기 만큼 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허상이다. 여름과 겨울처럼 힘의 우열이 확연하게 가려졌기 때문이다. 환절기가 오면 극명하게 대립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자연속으로 들어가 보자. 바람을 시련으로 보았을때 바람앞에 의젓하게 서 있는 생명체가 있는가. 모두 춤을 추어야 산다. 풀과 꽃과 물과 나무 모두 바람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야 살수 있는 것이다. 해가 비추면 고개를 들고 비가 내리면 고개를 숙이고 겨울이 오면 내 수족의 일부를 버리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엔 이 사계절이 있어서 잘 돌아간다. 여름만 있는 세상도 있지만 그 세상이 바람직 한가. 여기서 발전의 원동력은 창의이며 갈등이며 불편 그리고 경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겨울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필자는 겨울을 전환기로 본다. 혁신으로 본다. 독재로 본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으로 본다. 이 겨울이 지나야 다시 봄이 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부정하고 싶은 자연의 현상이다. 사람도 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이 사계절이 존재함으로써 자연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세상도 잘 돌아갈수 있다고 말하면 공감 하겠는가. 우리는 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스승이다. 책도 스승이다. 그러나 자연은 큰 스승이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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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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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자연은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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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 <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있는지요. 그럴리 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 기분이 언찮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까지 말을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저에게 더 화를 내면서 "참내, 인사도 못하겠네요."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좀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분명 저에게 별로 기분이 좋은 인사는 아니였습니다. 바로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때 바로 제가 느낌 감정은 아니 내가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고를 한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그 사람을 한두번 만날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하는데 그동안 그 인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죠. 만나면 '수고하셨어요' 가면서는 '수고하세요' 늘 이런식입니다. 이 인사법이 왜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 어른을 만나면 '진지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을 만나면 '밥은 먹었냐' 라고 인사를 했죠. 아니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잤냐' 이때 시대가 아마 육이오를 겪은 1950년대부터 1970년때까지 30년인가 봅니다. 불행한 육이오를 거치면서 생겨난 인사법이지요. 당시 3끼 밥 먹으면 아주 잘 사는 것이지요. 간밤에 어느놈이 해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엔 어떤 인사법이 유행했을까요. 바로 '수고' 라는 인사입니다. '수고하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법이 만연되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요즘도 가끔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엔 밭일 노동일 집안일 온통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인사법이 유행했나 봅니다. 부모형제는 물론 직장 상하간 또는 친구와도 이런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가 만연되었죠. 국어사전 상 수고<受苦>의 뜻은 '일을 하느라고 힘들이고 애씀'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 은 무엇일까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는 틀린 인사법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나 모두 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에 기분이 나쁠까요. 제 생각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하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노동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인사는 과거 우리가 힘들게 살때 유행하던 인사법으로 육체노동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죠.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퇴근 하면서 사장에게 '수고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어떨까요. 또는 사장이 퇴근하는데 직원이 '수고하셨어요' 하며 인사하면 어떨까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인사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요즘 인사를 어떻게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또는 '편안하세요' 이런 인사를 많이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이런 인사법이 유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먹고살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먹고 살만하니 건강해라 행복해라 편안해라 이런 인사가 유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장 상사를 만날땐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가겠습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이런 인사가 좋을 것으로 봅니다. 상사가 아니라 해도 평소 수고하셨어요 보다는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보다는 먼저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법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친구 또는 편안한 사람에게는 잘가 아니면 또 보자 먼저 간다 이런식의 인사법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우선 자동차부터 컴퓨터와 그 컴퓨터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들. 그뿐이 아닙니다. 문화에서도 빠르게 변화를 합니다. 특히 명절에 대한 변화입니다. 요즘엔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아 비행기 예약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과거엔 추석이나 설날에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면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놈' 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죠. 추석엔 반드시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요. 성균관인가요. 거기에서 제사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50% 넘게 지내지 않겠다' 고 답변했답니다. 향후 제사도 간편하게 변할 것 같아요 추석과 설날 풍경도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인사법도 갈수록 간편하게 변화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니면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편안하셨지요 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수고하세요 또는 수고하셨어요 라는 인사법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건강과 행복 편안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하세요 헤어질땐 먼저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 말고 다른 좋은 인사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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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인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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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에세이> 살아온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허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가 영어회화 공부를 할까 하다가 아내가 여행을 가자는 곳을 생각하다가 생각만 하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이제 세상에서 호기심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허전한 것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호기심이 실천의 원동력이였단 말인가. 나에겐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를 여행가면 하루 이틀 만에 그 근방은 모조리 뒤지고 다닌다. 길을 보고 건물을 보고 나무와 풀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했다. 처음에 유럽여행을 할때 비행기 안에서조차 과연 유럽이라는 곳에 사람이 살까. 고교시절 세계사를 배워 알고 있는 그 유럽에 과연 그것들이 존재할까 세느강과 템즈강이 과연 있을까. 그곳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이고 풀은 어떤 풀일까. 기후는 알고 있는데로 온화하고 자주 비가 내릴까. 사람들은 금발머리도 많고 덩치가 클까.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들은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어쩐지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심을 해야 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마 호기심 전의 마음이 의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의미는 이제 세상을 거의 다 안다는 말과 같다. 유럽에 가니 알고 있는 그데로 였고 미국에 가니 마찬가지 이고 동남아시아에 가니 물론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다른 곳은 직접 가지 않아도 사전에 간접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호기심은 사라질수 밖에 없다.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았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이나 역사 현상 등과는 달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라진지 오래됐다. 가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찾으면서 사람을 만난후 또 싫어진다. 싫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을 또 찾는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그 중간의 시간이 바로 허전함이다. 외로운 것일까. 외롭다 하더라도 외롭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 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성과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허전함이다. 농촌으로 귀촌해서 혼자 사는 친구에게 이 허전함에 대해 질문을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홀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허전하다니 너도 귀촌해' 라는 말이 숨도 쉬지 않고 들린다. 나이 들면서 이제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 살면 밤과 낮으로 할일이 많아져 허전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친구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친구는 왜 아내를 도시에 남겨 놓고 시골로 내려 갔을까. 일선에서 은퇴하니 남는 것은 시간이다. 현직에 있을때 함께 있자고 그렇게 갈망하고 애원하던 시간은 이제 그때와는 달리 다른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착 달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른다. 그때의 시간의 모습은 냉혹한 겨울이였지만 지금의 시간은 따뜻한 봄인듯 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징그럽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지는 것이다. 많으면 그런가. 부족하면 귀하고 많으면 징그럽단 말인가. 부부사이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징그러울때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주 다툰다는 말인가. 아무튼 시간은 나를 싱거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하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시간은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만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게 하거나 유치한 글을 써서 페이스 북에 올리게 하고 나 자신에 대해 나열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간은 내가 나의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시간이 내 곁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이러한 시간의 역할이 나를 허전함에서 구명해 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허전함이 사라질줄 알았다.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일까. 분명 나는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을때가 많다.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을 올리고 난후 나는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후엔 허전함이 더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웃는다. 시간이 나를 비웃는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저기 서산에 걸터 앉아서 웃는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다. 가만 보면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풀잎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고 구름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때가 되면 어둠이 내리면서 달과 별이 나타난다. 시간은 나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결코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지는 않다. 과거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 군대시절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처럼 시간이 나에게 착 달라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시간을 감당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춤도 추고 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할 것이다. 시간에는 계절이 있다. 계절은 시간이 만들어 낸 실상이다. 시간이 허상이라면 계절은 실상인 것이다.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그 계절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서 난 계절을 여인으로 가정하고 내 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하니 참 웃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내 연인은 4명이다. 그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미울때도 있고 과거처럼 일을 만들어 시간을 떠나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 이들과 지내면서 그 허전함을 잊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허전함은 심해질 것으로 보고 계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든 터득해야 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봄은 화려하지만 좀 철이 없을것 같다. 여름은 열정적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낭만적이니 철없는 나와 아주 잘 맞을 것으로 본다. 가을과 함께 자주 춤을 추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이팅게일 춤을 출 것이고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할 것이다. 겨울은 냉혹하다. 조심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감기도 주고 몸살도 주고 사고로 상처도 준다. 반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꽃을 준다. 이렇게 이들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인생의 허전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시간아 고맙다. - 김종호 건국대 졸업(서울)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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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에세이 - "시간아 고맙다"